이수희 기자
저 먼 곳, 어딘가에 있을 자유를 꿈꿨던 작가 체호프
철학자 랑시에르가 쓴 신간 '체호프에 관하여'
체호프의 '갈매기' 중 한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소설은 통상 장편과 단편으로 나뉜다. 소설 분량에 따라 장단을 나눠 구분하지만 어쨌든 '소설'이라는 명칭이 따라붙는다. 10권으로 이뤄진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20여쪽 분량의 '달려라 아비'(김애란)나 다 같은 소설이다. 영어에선 다르다. 소설을 의미하는 '노블'(novel)이란 명칭은 오로지 장편 소설에만 붙는다. 단편은 '쇼트 스토리'(short story)라 불린다. '세계문학전집'을 수놓는 작가들은 대체로 노블을 쓰는 소설가들이다. 예술가로서 한 시대의 정점에 올라섰던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위고, 발자크 같은 작가들은 대체로 '노블'로 명성을 얻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작가인 안톤 체호프(1860~1904)는 특이하게도 단편 소설로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인생의 정수를 건져 올리는 체호프의 매력에 빠진 작가는 무수히 많다.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 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또한 소설을 즐기는 자 중에 체호프에게 열광하지 않는 이들도 찾기 어렵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도 그 같은 경우다. 랑시에르가 쓴 신간 '체호프에 관하여'(글항아리)는 제목 그대로 체호프 작품에 대한 분석서다. 그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먼 곳의 자유'(Au loin la liberte)를 체호프 작품의 정수로 본다.
자크 랑시에르 [연합뉴스 자료사진]
체호프 소설이나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개가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 방황한다. 단편소설 '3년'의 주인공 라프체프는 체념 속에 살아간다. 인생이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래서 순간순간을 견뎌야 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개인적인 행복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욕망도 희망도 꿈도 없이 살아야 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늙음은 서서히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삶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건조한 라프체프의 인생에도 어떤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재산에 혹해 결혼한 아내가 3년이 흐른 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혹은 우연히 두 젊은 연인의 열정적인 고백과 입맞춤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건 라프체프가 돈의 노예로, 재산 관리자로 살아갈 운명을 떨치고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다.
"그는 안마당 한가운데로 나아가 와이셔츠의 가슴 단추를 풀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유에 대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기분 좋게 죄어왔다. 그는 기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경이롭고 시적이며, 어쩌면 성스러울지도 모를 삶을 상상했다…."
이와 같은 '자기 삶의 완전한 혁명', 즉 "예속된 시간"에 균열을 내며, 먼 곳에 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섬광 같은 순간이 주인공에게 찾아오지만, 체호프 작품 대부분에서 이런 삶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희곡 '세자매'에서도 세 자매 올가·마샤·이리나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쳇바퀴 속 일상에서 탈출을 꿈꾸고, 그 꿈이 거의 이뤄질 듯하지만 결국 그 꿈은 좌절된다.
연극 '세자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희망과 불확실이 공존한다. 랑시에르는 이런 공존이 "시간이 먼 곳의 자유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확실한 삶은 아직 멀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끈기 있게 시작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작과 끝 사이에는 정해진 단계가 없고, 특히 시작은 단순한 출발점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 단절이자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 전환점에서의 운명은 매 순간 다시 결정된다."
짧은 분석서이고, 철학적 내용이 있어 난도가 있지만, 당장 체호프를 다시 꺼내 들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체호프를 읽었던 이들에겐 책장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한번 정주행하고픈 욕망을, 체호프를 접하지 못했던 독자라면 당장 서점에 가 책장을 펼쳐보고 싶은 열망을, 책은 부추긴다.
유재홍 옮김. 144쪽.
책 표지 이미지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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